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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보랏빛 연기 아래로 활활 불타는 불꽃은 사람들 사이로 전해지 는 지옥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얕게 나던 자류금의 냄새도 새카맣게 타버 린 잿더미 속에서 맥을 세우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덕분에 기세 좋 게 타오르는 불꽃 위에 자색을 태운 탄내가 사방을 덮어버렸다.

수랑, 당신이 원하던 게 이거였습니까?

죽어버려 시체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수랑은 과연 이 모습을 바랐을 까? 그녀는 이런 결말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키는 했을까?

당신이 당신의 나라를 위해 한 행동이 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습니까? 눈이 있거든 이 모습을 보십시오. 본인이 만든 무기가 대량제국 의 손에 들린 이 모습을.

거센 바람을 따라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끝내 버티고 서있던 나무들도 하나둘씩 아래로 몸을 뉘었다. 지면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뭇 잎은 가까이 닿기가 무섭게 새카만 재가 되어 공기 중에 흩날려 고윤의 눈 앞에 버젓이 지나갔다. 고윤은 산속에서 뛰어나오는 적을 바라보는, 장경 을 바라봤다. 경갑을 입고 있는 장경의 뒷모습은 말 위에 올라타 언제라 도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는 선두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었 으며, 수랑이 대량제국에 넘겨주고 간 ‘무기’였다.

가벼운 말발굽 소리를 내며 고윤이 옆으로 다가갔다. 곁을 지키던 장병 들이 고윤을 확인하곤 좌우로 옆을 비켜주었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장 경과 나란히 선 고윤은 그의 시선을 따라 땅을 구르는 북만을 응시했다. 등에 붙은 불길이 잡히지 않는 그는 가엾게도 좌우를 살피며 물을 찾았지

만, 주변은 이미 장경에 의해 길이 막혀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황무지 땅 이었다.

“고 사령관, 재미있지 않습니까?”


장경이 먼저 물어오자 고윤은 잠시 침묵했다. 살기 위해 움직이는 몸부

림이 재미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는 쓸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산이 재 미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고윤은 사내를 보던 시선을 거두어 장경 을 바라봤다.

“무엇이 재미있으십니까?”


도리어 돌아온 질문을 따라 장경 또한 고개를 움직여 고윤을 바라봤다.

호면을 벗은 장경은 땀에 젖었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세찬 바람에 수분을 빼앗기곤 얼굴 위를 마구잡이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장경은 뒤를 수놓은 불을 모조리 흡수한 새빨간 눈을 하곤 네 개의 동공으로 그를 바라봤다. 순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괴이한 모습을 보여주곤 얕게 웃음기를 띤 그는 고윤에게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했다.

“당연히,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지요.”


찰나동안 고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과 뒤

이어 코끝을 매섭게 만드는 이 한마디는 말에서 낙마하여 타오르는 불길 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 고윤을 흔들곤 가볍게 떨어진 장경 의 네 눈동자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장군, 진정하세요. 그는 아직 이 안에 있으니까.”

가슴을 통통 두드린다. 경갑끼리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에 고윤의 안색 이 새파랗게 질렸다.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호면으로 얼굴을 덮은 고윤 은 질린 얼굴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튼수작 부리는 순간 저는 그 안에 든 녀석도 버릴 준비가 되어있습니 다. 그러니, 허튼짓하지 마시고 ‘무기’로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 썩 꺼지시 오.”

고윤은 말 머리를 돌려 장경과 서 있던 절벽에서 뒤로 멀어졌다. 주인 의 기분을 아는 모양인지 말은 히이잉 하는 짧은 울음을 끝으로 또박또박, 그러나 천천히 주인의 힘 없는 몸을 흔들지 않고 곧은 자세로 멀어졌다.

고윤은, 장경을 잃었다.

숨 쉴 곳 없는 공간에도 사람은 있다. 열을 이기지 못하고 바깥을 향해 뛰쳐나가는 잡배와는 사정이 달랐다. 몸을 낮추어 피어오르는 불꽃을 피 하며, 흙과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기곤 얇은 눈꺼풀을 접어 먼 곳을 응시했 다. 두터운 중갑 위로 내려오는 뜨거운 열은 쇠를 달궈 뼈와 살을 붙게 만 들지언정 가슴 깊이 새겨진 한을 잿더미로 만들진 못했다. 절벽에 서서 가 만히 광경을 지켜보던 흑오아들이 드디어 잿더미 위에 몸을 세웠다. 숨죽 이고 기다린 시간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휘익— 날카로운 휘파람을 시작으로 불꽃을 머금은 날카로운 쇳덩이가 현철영의 위를 수놓았다. 멈출 줄 모르던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려 공중에 서 길게 울음소리를 냈다. 지면에 꽂히는 날카로운 화살을 가까스로 피한

흑마는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아 흥분을 가라앉히곤 올라탄 사람의 사고가 분명하도록 자리에 못 박은 듯 섰다. 대수롭지 않은 휘유— 소리가 갑옷 사이에 흘렀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 고윤만 심장 을 철렁이며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가득 쥐었다. 주인의 심정을 헤아리 던 군마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발을 동동거리며 불안한 눈으로 떨어지는 화살을 바라봤다.

절벽에서 내려오길 기다렸다는 듯 까맣게 탄 산속에서 화살이 빗발쳤 다. 불에 그을은 화살촉은 보란 듯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열기를 자랑했 고, 운이 나빠 화살에 맞은 말의 몸뚱어리는 기름진 탄내를 내며 까맣게 상처를 구웠다. 겨우 정신을 차린 고윤이 서둘러 장경에게 다가갔다.

“잠시 뒤로 빠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산속에서 다시 한차례 화살이 높이 솟아올랐다. 덩달아 활시위를 팽팽 하게 잡아당겨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하나둘 속속들이 내려오는 화살 을 맞추어 궤도를 변경했다.

“까짓거 무얼 얼마나 하겠습니까?”


한번 바라봤다 흘겨보며 되돌아가는 시선 속에 고윤은 피가 거꾸로 솟

는 듯 했다. 이기지 못할 아집을 부리는 경우는 많이 봐왔다. 고윤 역시 그 러했다. 다음날에 대한 기대가 없었고, 자기 자신이 내일에도 눈을 뜰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삶을 살았던 고윤은 그런 류의 아집을 자주 부려봤 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고, 살아간다는 것에

집착을 갖게 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건 순전히 혼자 일깨 운 것이 아닌 장경이 알려준 값비싼 보물이었다.

잦은 도발에 쉬이 넘길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르골의 한 마 디마다 고윤은 맨발로 칼산을 걸었고 불바다에 몸을 담갔으며 목구멍을 쥐어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 무더기를 그 앞에 내뱉어야 했다. 설령 눈 물이 차오를지언정 정인이기 전에 사람이었고, 그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안정후 고윤이었다..

등허리에 매고 있던 할풍인을 뽑아 들은 고윤은 지체없이 날카로운 칼 날을 뽑아 장경이 타고 있던 말 앞에 내리꽂았다. 말발굽 바로 옆을 노려, 한 뼘 땅속 깊숙이 들어간 할풍인은 누구의 이름도 쓰여있지 않은 고윤의 것이었다.

“전하, 이 앞에 맹세하시지요. 이곳에서 승전보를 날릴 때까지 후퇴는 없을 것이라고.”

“사령관께서 꽤 약이 올랐나 봅니다. 좋습니다. 이민, 이곳에서 승전보 를 날리기 전까지 후퇴하지 않을 테니 두고 보시지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 하려던 고윤의 말머리를 장경이 기민하게 낚아챘다.

“장군도 이 할풍인 앞에 약조하시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또다시 하늘을 수놓은 화살을 장경이 바라봤다. 쓰러지지 않고 꼿꼿하

게 서 있는 할풍인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내린 장경은 골똘히 하던 생각 을 멈추곤 돌연 전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 전장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웃는 장경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바득바득 속이 터  져나가는 마당에 고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우르골에게 숨길 수 있는 것 이 무엇이 있겠는가. 고윤은 마뜩잖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이미 남에게 바쳐진 일생입니다. 전장에 바칠 일생이 없어 송구 합니다만, 다른 것으로 약조하겠습니다.”

마른 땅속에 욱여넣은 할풍인 옆으로 지면이 이기지 못하고 가는 실을 만들어냈다. 고윤이 손을 뻗어 할풍인을 붙잡았다.

“이곳이 마지막 종착지인 것은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고윤의 손아귀에 우지끈 뽑혀 나온 할풍인은 날카롭던 칼날이 흙먼지에 뒹굴어 뿌옇게 변해버린 날에 아무것도 비추지 못했다. 고윤이 탈탈 털 어내 눈에 보이도록 떨어지는 모래에도 여전히 뿌연 날을 자랑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전하를 베겠습니다.”

무뎌 보이는 칼날이 장경을 향하는 대신 그의 몸 아래에 있는 말의 목덜미를 노렸다. 말이 베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 빛을 잃은 할풍인의 위 로 새빨간 핏방울이 날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이 제 약조입니다.”


우르골 덕택에 가슴 속 파도는 잔잔할 날이 없었다. 고윤은 그에게 한마디를 전해 받는 순간 범람하는 파도를 막지 않았다. 철썩이며 절벽에 가로 막혀도 그 위로 솟구친 물방울은 작은 반향을 만들어냈다. 고윤은 장경에 게 튀는 물방울을 거두지 않았고, 그는 얕게 웃으며 얼굴에 튄 물방울을

조심스레 소매로 닦아냈다. 흔적조차 없이 얼굴에 사라진다 해도, 젖은 소 매는 마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랴! 하며 고윤이 앞으로 내달리자, 뒤에서 그를 호위하던 현철영 병사 들이 꽁무니를 쫓아 달려 나갔다. 북만을 겁먹게 하는 흑오아의 모습은 장 경과 몇 병사를 남겨둔 채 여전히 불타고 있는 산속으로 몸을 던졌다.

우르골은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는 것은 무엇일까? 고윤이 말하는 ‘원 래대로’라 함은 우르골이 장경의 자아를 비집고 표면에 나온 지금 이전 아 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르골의 ‘원래대로’는 고윤과 맞지 않았다.

내가 살아 있었을 때, 내 두 팔과 다리가 남아 있었을 때, ‘장경’이 아닌 ‘내가’ 살아 있었을 때가 원래대로였다.

우르골의 붉은 두 눈이 차갑게 식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산을 바라보아 도 뜨겁지 않았다. 그는 까맣게 타버린 산속으로 들어가는 고윤의 뒷모습 을 바라봤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것 같은 상대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 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고윤의 바람만큼 우르골 또한 원래 대로 를 원했다.

집어먹을 듯이 타오르던 불이 모두 꺼졌다. 산에서부터 시작한 자욱한 연기가 눈 앞을 가렸지만, 철갑을 두른 이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적군을 찾아 목을 베었다. 선두에 선 고윤은 특히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할풍인을 높게 들었다. 아군의 코앞에서 멈춰선 고윤의 할풍인은 자신보

다 앞서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고, 우두머리의 뜻을 따라 누 구도 고윤보다 앞서가 적군의 숨통을 끊지 못했다.

억지로 생명이 끊어진 나뭇잎은 바스락이지 못하고 발길에 밟혀 까만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말에 올라탄 고윤은 말발굽에 붙은 쇠붙이가 달궈 져 말이 더는 걷지 못할 때까지 산속을 이 잡듯이 뒤져 적군의 몇 남지 않 은 생명을 앗았다. 북만은 이로써 재기할 힘도 사라졌고, 그들의 칸은 휠 체어 위에 앉아 소리 없는 눈물만 삼켜야 했다.

“됐다. 돌아가.”


훌쩍 말 위에서 내린 고윤이 군마의 엉덩이를 한 대 치자,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말이 서둘러 산 밖으로 몸을 피신했다. 굳은살이 발아래에 박혀 있더라도 짐승은 실제 불산을 이길 수 없었다. 시야 너머로 다급하게 사라 지는 말을 바라보며 고윤은 할풍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부터 누군 가가 고윤의 뒤를 바짝 쫓아 오고 있었다.

 

“누구냐.”


평소 같았더라면 우거진 수풀 사이로 움직이는 소리에 다가오는 행방

을 알 수 있었지만, 이곳은 고윤에게 불친절했다. 고윤은 새카맣게 타버 린 산의 풍경 속에 녹아버린 상대를 찾아 몸을 한 바퀴 빙 돌았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 가느다란 칼날이 고윤을 향해 날아왔다. 타 닥타닥 잿더미가 되는 소리 사이로 작은 소리만 내며 쏜살같이 달려 온 칼 날은 고윤의 어깨 갑옷을 힘없이 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칼날이 날아

온 방향을 향해 고윤이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서서 고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죽여서 아쉽게 되셨습니다.”
“그 얇은 칼날이 어찌 사령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엔 조심이 담겨 있었고, 눈에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경계를 품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할풍인을 붙잡은 손은 어떤 의도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고윤은 할풍인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장경, 우르골의 손을 바라봤다.

“안심하세요. 금방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르골, 네가 살고 싶어 별짓을 다 하는구나.”


장경의 탈을 쓴 이것은 장경이 아니다. 고윤은 수십 번, 수백 번도 자신을 향해 그리 외쳤다. 모진 말을 하고도 장경이 들을 수도 있는 말을 어찌 내뱉는 것이야. 하며 속으로 제 뺨을 때린 적도 많았다. 이제는 급기야 서 로를 향해 할풍인을 겨눈 모습을 그의 눈에 똑똑히 새겨야 한다는 사실이 한스러웠다.

장경, 이제 그만 돌아와.

닿지 못할 혼잣말을 가슴속에 새기며 고윤은 내디딘 발에 힘을 실었다. 찰나의 순간 하얀 볼을 타고 뒹군 투명한 물방울은 호면 아래에 가려져 우 르골의 시야에 들지 못했다.

챙강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힌 할풍인은 손아귀 힘을 겨루느라 몸체가 부들부들 떨리다 이윽고 서로를 겨냥한 칼날이 거둬지고 몇 번의 수를 주 고받았다. 둥근 뼈대를 가볍게 밀치고 올라타 상대방의 중심을 흩트려 거침없이 아래로 찔러넣은 고윤의 할풍인은 한차례 자류금을 태운 뒤 우르 골이 반박하기 전, 날카로운 칼날이 회전하며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장경!”


바득 이를 깨문 고윤이 한 자씩 힘을 주어 장경을 불렀다. 달려오는 할풍인을 되받아치기 급한 와중에도 우르골은 웃음 띤 목소리를 거두지 않 고 이죽이며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의부? 하하.”
“닥쳐!”


마음에 불안이 차면 휘두르는 무기에도 불안이 깃든다. 장경이 할 법한대사를 읊는 우르골에 한차례 가슴 속에 폭풍이 몰아친 고윤은 그 기세를 따라 삐걱거리는 동작을 풀지 못하고 우르골의 반격을 받았다. 바뀐 전세 에 순간 당황하였다가, 이내 능숙하게 맞받아치며 고윤은 흉흉해졌던 마 음을 바로잡았다.

“아무리 악신이라 하여도, 하룻강아지 같은 네 녀석의 솜씨에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이곳이 내 묫자리는 아니다.”

“그럼 저의 묫자리는 봐두셨습니까? 의부?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 가 는 불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빠르게 주고받는 합 사이에 승산이 있는 것은 당연 고윤 쪽이었다. 이 는 우르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승산이 있는 싸움만 한다. 먼 뒤까지 내다 본 우르골은 자신의 실력을 모두 쏟아부어 고윤을 한풀 꺾이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고윤의 할풍인은 멈춤이 없었다. 겨눈 상대가 장경의 몸을 갖고 있다고 한들 그 안에 든 것이 장경이 아니라며 수 없이 되뇐 결과였다. 조금씩 힘 에 부쳐 뒷걸음질 치는 우르골의 발에 다리를 걸자, 그대로 풀썩 꺼지며 하체가 무너진 우르골의 위로 고윤이 올라탔다. 그때였다.

“자희....”


내가 뭐 하러 너보고 칼산과 불바다를 걸으라 할까? 고윤은 그때 장경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뱉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칼산과 불바다를 횡단하고도 모자랄 듯 하구나.

할풍인을 붙잡은 손에 힘이 턱 하고 빠져나갔다. 고윤은 흔들리는 시선 을 애써 맞추며 쓰러진 장경의 시야에 눈을 맞췄다. 뒤집어쓴 호면이 마주 하는 시야를 가로막았지만, 고윤의 동공은 세차게 흔들리며 장경을 바라 봤다.

“자희... 아픕니다....”


서둘러 장경의 몸에서 떨어진 고윤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달달 떨리는 손은 이미 할풍인을 멀리 떨어트린 채 장경의 차가운 경갑을 더듬거렸다.

“장경, 장경... 장경 돌아왔어......?”


꺽꺽 눈물이 나오는 것도 참아냈다. 얕게 들리는 목소리는 장경의 따스한 목소리가 맞았다. 그립고 그리워서 매일 밤 잠들 때마다 뒤척이며 환청 으로 들어왔던 그 목소리. 장경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고윤을 바라봤 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 속에 고윤은 그의 온몸을 다시 한번

만져봤다. 새카만 호면을 벗어내 얼굴을 바라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으나 그는 두려웠다.

벗었을 때, 빨간 동공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면? 장경의 얼굴을 한 우 르골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면?

그런 의심 속에도 장경이 돌아왔을 지도 모른다는 꿈속에 고윤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 그 얼굴을 붙잡았다. 호면을 쥔 손이 전보 다 더욱 격렬하게 떨려왔다. 달칵 소리를 내며 갑옷과 분리된 호면이 천천 히 장경의 얼굴에서 벗겨져 갔다. 턱의 살갗이 드러났을 땐 심장이 크게 요동쳐 숨이 멎을 뻔했다. 장경의 굳게 다문 입을 보았다. 우르골이었다 면 진작에 웃음을 머금고 나를 놀리지 않았을까? 일말의 희망을 품은 순 간 고윤이 호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까만 호면 위로 붉은 선혈이 튀었다.
자색 연기가 뒤따라 고윤의 몸 뒤에서 피어올랐다.
누운 채로 들썩이는 장경의 어깨가 고윤의 시야에 느릿하게 들어왔다.

 

“하하, 하하하하.”


몸을 꿰뚫은 할풍인은 숨겼던 칼날을 드러내 빠른 속도로 고윤의 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고윤의 얼굴을 가린 호면에 튀고도 모자라 아래로 흘러 내린 피가 장경의 호면까지 튀어 붉은 그림을 한 점 그려냈다. 한차례 입 으로 피를 쏟고도 고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뱃가죽이 아파 데굴데 굴 굴러야 마땅한 상처에도 고윤의 시야는 장경의 얼굴을 담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새빨간 눈이 고윤을 바라보며 휘어지게 웃고 있었다. 참지 못할 정도로 우스운 모양인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우르골은 손에 쥔 할풍인을 멀 리 내던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느릿하게 보이는 그 동작엔 여유가 넘 쳐흐르고 있었다.

갑옷을 뚫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고윤이 손을 움직여 상처 부위를 짚자 차가운 갑옷 위로 느껴지는 피의 온도를 알 수 없었다. 몸이 뜨거워진 것 만 알 뿐이었다.

“의부, 저를 미워해 마세요. 그대와의 ‘원래대로' 돌아가는 약조를 위하 여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르...골...”

“자희, 어디 크게 다치셨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진 소저를 어서 불러 살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르골.”

“고 사령관. 자네의 깊은 충신은 알겠네만 어떻게 천자의 핏줄에게 할풍 인을 겨눌 수 있단 말입니까.”

“우르골...!”


시시각각 태도를 바꿔 고윤을 상대하던 장경은 우뚝 솟아 고윤을 내려봤다. 벗겨진 호면 뒤로 숨어있던 비열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자, 장경 의 얼굴을 한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고윤이 가장 좋아하는 휘 어지는 웃음을 하며 이를 드러내곤 가장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바득 갈리 는 이와 반대로 몸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만 봐야 하는 고 윤은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찢겨진 것 같았다.

이대로 내가 죽어 버리면, 장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돌아온 그를 반 겨줄 사람이 있을 것인가?

차례대로 심역, 진경서, 왕숙, 곽단 등의 그와 어울리던 사람들이 지나 갔다. 고윤은 그중에 제가 없음에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옆자리에 굴러떨어진 할풍인이 보였다. 장경은, 우르골은 자신이 이뤄낸 광경을 보느라 그쪽을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할풍인이 뚫고 지나간 상처에서 피가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조금의 움 직임에도 버티지 못하고 한 뭉텅이 쏟아 내는 멍울에 고윤의 얼굴이 새하 얗게 질렸다. 호면으로 얼굴을 막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 한 손으로 다급 하게 벗어내자 산의 탄내가 코에 들이닥치며 고윤은 다시 한번 허덕이며 숨을 골라야 했다.

“여기가 그대의 묫자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틀렸습니다!”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보며 우르골은 코웃음을 쳤다. 천천히 죽 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작정한 모양인지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고윤에게

는 기회였다. 그는 우르골 모르게 할풍인을 붙잡은 손을 겨눴다.
가만히 서서 모습을 지켜보던 우르골의 두 동공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고윤은 남은 힘을 짜내 쥐고 있던 할풍인의 칼날을 세워 자신과 똑같은 위 치에 할풍인을 겨눴다.

“내가... 내가 말해지 않았느냐... 원래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를 베 겠다고...!”

고윤의 상처 위치에서 비켜 지나간 할풍인은 깊지 않은 상처를 남기곤 바닥에 떨어졌다. 삼혼칠백이 찢기는 고통 속에 고윤은 장경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몸이 먼저 찢어지고, 뒤이어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 는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픔이 밀려왔지만, 제 몸이 죽고 죽어 잿더 미 위에 묻혀진대도 장경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욱 고윤의 숨통 을 옥죄어 왔다.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바라보며 우르골의 웃음기가 전면에서 사라 졌다. 벤다. 베어 목숨을 앗아간다. 베어서 죽는 모습을 바라본다. 마음을 크게 가져 고윤의 저승길에 배웅해주려던 호의를 이런 식으로 받을 줄은 몰랐던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감싸 쥐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의부, 끝까지 구질구질합니다. 언제까지 의부 노릇을 하려 드는 겁니 까?”

구질구질해.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어차피 죽을 놈. 차게 식은 눈을 한 우르골이 그를 바라봤다. 심장 언저리부터 시작된 분노는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쿵쾅쿵쾅 대며 뛰는 심장이 상처에 놀 라 뛰는 것인지, 아니면 가둬진 장경 그 자신의 마음이 이리 뛰는 것인지 우르골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퉤—

입안에 고인 피를 땅에 뱉은 우르골은 점점 더 무너져 몸을 바닥에 납 작 엎드린 고윤을 바라봤다. 저대로 두면 분명 죽는다. 누군가 빠르게 다 가와 그를 구조해가도 죽는다. 이미 모든 내장은 파열되어 기사회생할 여 지가 없었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자욱한 연기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우르골은 욱신거리는 상처를 틀어막고 고윤을 향해 소리쳤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사령관! 저의 운명은 이곳이 끝이 아닌지라 살아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이 안의 녀석은 제가 잘 데리고 있다 죽는 저승길 에 함께 돌아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심은 어떻겠습니까? 하하!”

약이 바짝 올랐으나 반박할 힘도 없었다. 장경이 조금씩 멀어지는 모습 을 바라보며 고윤은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어두컴 컴한 산속에서 하나가 되어 점으로 변해버리는 모습은 죽어서도, 새로 환 생을 한다 해도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

장경....

그 이름을 몇 번을 부르는 걸까. 고윤은 입안을 맴도는 이름을 밖으로 부르지 못하고 속으로 계속해서 불렀다. 장경, 장경, 장경, 내 아들, 내 사 랑. 결국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너를 보지 못하는구나. 바닥에 이마를 맞댄 고윤의 눈을 비집고 투명한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너를 빼앗기지 않으려 굳은 마음을 먹었지만, 네 앞에서는 정말 소용이 없다. 이렇게 되 어버린 나를 어떡하면 좋을까. 내일은 네가 돌아올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살았는데, 이젠 기대 할 수 있는 자격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한차례 뜨거워진 몸이 급격히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윤은 이제 장경을 올려다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빠져나가는 힘을 이기지 못 하고 천천히 고꾸라진 고윤은 눈을 감지 못하고 바닥에 보이는 우르골의 발을 노려봤다. 멀어지는 발을 붙잡지 못하고 자꾸만 시야가 좁아졌다. 흐 려지는 사고 중에도 손은 착실히 뻗어 장경의 발을 붙잡으려 했다.

안 돼. 가지 마.
고윤은 까맣게 시야가 닫히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놓았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기분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신이나 웃음부터 나올 줄 알았던 우르골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상처 때문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욱신거리는 상처가 고통스러워졌다. 미간 이 찌푸려지고, 거추장스러운 갑옷도 불편해졌다. 손을 불편하게 하는 장 갑을 벗어 던지자 땀에 축축하게 젖은 손이 쾌재를 부르며 바람을 만끽했 다.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기 전에 상처 부위를 틀어막은 손 위로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얕게 지나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피해가 큰 모양이었다.

손에 묻은 피를 바닥에 탈탈 털어내자 검게 탄 지면 위에 붉은 피가 물 들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은 무엇 때문인지 우르골은 알 수 없 었다. 분명 기뻐해야 하는 건데, 자신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인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하늘이 떠나가라 웃어야 하는데 현실은 꿈꿔왔 던 것과는 달랐다.

“왜...”


이상하게 목이 멨다. 금방 뒤돌아 돌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떼질 못했다. 상처 부위가 아닌 가슴까지 덩달아 욱신거렸다. 우르 골은 땅 위에 발이 붙은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바람과는 달리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던 몸을 붙

잡아 겨우 한쪽 무릎을 굽혀 그 옆에 넘어지려던 것을 가까스로 막아낸 우 르골은 크게 요동치는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안 돼. 어떻게 가진건데. 절대 못 줘. 우르골은 10살난 아이가 떼를 부리듯 칭얼거렸다. 안 돼. 내 거야. 이 몸은 이제 내 거라고.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자희... 자희......”


입 밖으로 나오는 이 이름은, 우르골이 원하던 이름이 아니었다. 그는 원치 않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나머지 무릎도 꿇은 채 그 앞에 무너졌 다. 저절로 상체가 숙어지며 얼굴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아... 으...... 아아...

따위나 내뱉으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던 장경은 떨리는 손을 이 끌어 고윤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경갑 위에 눌어붙은 핏자국 이 만져졌다.

“자희... 미안해요...”


쓰러진 고윤의 위로 장경이 몸을 덮었다.

관문 입구에 살구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전쟁의 불길에 휘말려 반이나 타 버렸다. 벌레와 개미도 오가지 않아서 진즉에 고사했거니 생각했는데, 돌아와 보니 마른 나무에 꽃이 피어 있더구나. 말라비틀어진 채 먼지 속에 서도 꽃봉오리를 틔운 것이 가련하기도 하고 어쩐지 사랑스럽기도 했다. 군대에 있는 사람은 찬물을 끼얹은 재주가 있어서 꽃을 불쌍히 여기니 어 쩌니 하는 이야기를 해 봤자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라, 차라리 선수를 쳐서 남을 제압하자고 말하는 게 더 잘 통할 터다. 다음 가지는 너와 놀러 가서.......

자희, 우리에게 봄은 오지 않았지만... 다음 생에는 함께 시작하여 수많 은 봄을 마주하고, 함께 매화 가지를 자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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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뒤집히고 망망대해에 홀로 남은 것 같은 그 순간의 기분 을 장경은 잊지 못했다. 어린 날의 그 파괴적인 감상은 장경의 머릿 속 깊숙한 곳에 흔적처럼 남았다. 장경은 가끔 어둡고 질척한 감정 이 제 머릿속에 벌레처럼 기생하고 있다고 느꼈다. 저를 뱃속에 품 고 있다가 세상에 내보낸 혈육으로서의 어미가 아니라 자신을 죽도 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하면서도 몇 번이고 살려내서 제 곁에 묶 어두었던 그 어미에게서 남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 벌레이리라. 창백한 낯빛에 불그스름한 연지를 바르고 연지보다 더 붉은 피를 토해낸 어미가 죽은 날, 제 머릿속에 남겨두었던 벌레가 비로소 공 포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것은 ‘우르골’이라는 존재와는 조금 다른 것이 다. 마냥 어미라는 여자가 저를 싫어하는구나, 생각하던 어린 사내 애에게 그것이 사실이라고, 심지어 그 여자는 너의 친어미도 아니었 다고 그렇게 자신의 입에서 토해진 진실을 마주하고 나서 얻은 것 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에게 남긴 것이라고는 그 증오와 광기의 흔 적인 어느 종족의 괴악한 저주뿐이고, 이것을 지워내기만 한다면 뭐 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던 적도 있었다. 사실 반쯤은 사실이었 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했고, 조종했고, 안달하게 했다. 장경은 제 머릿속에서 가끔 포악한 본성과 마주해야 했고, 또 밀어내야 했 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고. 저것은 나에게서 도려내야 하는 시련일 뿐이라고.

자신을 미치게 만들 거라고 믿고 있던 존재를 제거하고, 이 나라 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다. 매일을 바쁘게 살면서 모든 것을 제거 했다고, 내가 이겼고, 그것은 이미 지나간 무언가였다고 섣부르게 승리를 자신했을 때 그것은 불현듯 나타났다. 우르골이라는 종양은

이미 파헤쳐졌고, 남은 것은 파내고 난 상처뿐이었다. 그 흔적을 파 먹고 후걸이 남겨둔 벌레는 고개를 들었다.

가장 두려운 것을 보여주는 악몽 속에서 장경은 형편없이 뭉개졌 다. 어리고 나약한 장경은 이미 자라서 하늘(旻)이 되었음에도 억누 르지 못하는 포악한 본성은 나약한 틈새를 비집고 나와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정인의 목을 졸랐다.

새빨갛게 이지러지는 동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데, 정인의 하얗고 가느다랗게 뻗은 목을 양 손에 가득 쥐어 꺾어낸다. 잠들어 고르게 내쉬던 숨소리는 일그러지고 헐떡거리는 숨과 발갛게 달아 오른 눈은 장경을 마주보았다.

장경, 입술이 가볍게 달싹거리고 정인은 손을 뻗었다.


“괜찮아, 쉬, 내가 있잖아.”


하얗게 질린 뺨을 감싼 손은 차갑고 따스했다. 보드라운 입술이

제 이마에 닿았고 장경은 눈을 떴다. 꿈이야.

다정한 입술은 상냥하게 웃었고, 장경은 숨을 헐떡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은은한 달빛을 받은 붉은 점은 도드라지게 빛났다. 장경 은 눈을 한 번 깜빡여 눈가의 젖은 흔적을 털어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장경은 그 몸을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그 목을 꺾던 제 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장경은 그대로 품 안에 끌어안겼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손은 뒷머리를 꼭 끌어 안았다.

“착하지.”


장경은 어린아이처럼 그 품에 정신없이 매달려서 어린 날의 언젠

가처럼 품 안의 탕약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 씁쓸한 향에 취 해, 장경은 달콤한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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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침상에 누워있던 여인은 그림처럼 눈을 떴다. 정월의 추위를 막아주는 문지방도 모든 것을 막아주지는 못해, 문 너머로 희미하게 앓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듣지 못했을 수 있으나 여인의 귀는 늑대의 것처럼 기민해서 잠을 설치는 소년의 괴로움이 똑똑히 들렸다. 고통스러운 앳된 목소리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법도 했으나 여인은 가만히 누워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아이의 방문을 두드리는 귀신은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니 이제와 쫓아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참 그 소리를 듣던 여인은 이불 밖으로 희고 긴 손가락을 꺼내어 이미 아는 셈을 하였다. 틀릴 리 없는 손가락 셈을 두어 번 더 하고, 그 모든 셈에서 손가락 두 개가 남는 것을 확인한 여인은 아주 반듯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두터운 겨울 이불을 걷어낸 여인은 침의만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정월의 한밤중 공기는 살갗을 찢을 것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여인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찬 공기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여인은 욕통을 들고 데워놓은 물을 받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았지만 창문은 열어두어 찬 공기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서늘해진 방 안에서 여인은 침의를 벗고 욕통에 흰 몸을 담갔다. 희고 고운 몸이었으나 고된 삶을 보여주듯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 흉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늑대의 얼굴만큼 보는 이를 압도하진 못하리라.

짝을 기다리는 늑대처럼 그녀는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턱을 들었다. 여전히 문 바깥에서는 악몽에 시달리는 새끼 늑대가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여인은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욕통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인은 꿈 속에서 여러 해 전의 일을 떠올렸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향, 더러운 토비들의 소굴에서 채 열 달도 품지 못한 아이가 삶이라는 고통을 재촉하던 날이었다. 여느 산부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마냥 조산에 괴로워하지도,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고통뿐인 삶을 시작해 남은 것이 고통일 것을 알면서도 품에 안은 핏덩이에 아주 잠깐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반미치광이와도 같은 상태로 그녀는 두 핏덩이를 어둠 속에 가두었다. 멍청한 토비들의 미신은 산모와 아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기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허름한 거처 입구에는 매일 정해진 시각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식사가 놓였다. 그것을 먹고 연명하며 그녀는 빛이 들지 않는 밤마다 아이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머리가 둘, 심장이 둘인 것은 자신이 아닐텐데도, 매일같이 생각과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살아남는 것이 자신의 아이였으면 하다가, 고통을 모를 적에 먼저 가는 것이 자신의 아이이길 바라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숨이 끊어진다면 그녀의 바람 중 하나는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먼저 축 늘어진 것은 곧게 뻗은 발가락이 예쁘고 자그마한 두 발이 한 손에 쏙 들어오던 자신의 아이였다. 고귀한 핏줄과 불결한 핏줄을 모두 타고난 자매의 아이는 과연 태생부터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혈통을 한 몸에 가지고 태어나더니, 제 사촌 형제까지 짊어지고 살 운명인 모양이었다. 얄궂은 운명의 아이와 남겨진 여인은 이제는 정말로 미쳐버린 것처럼, 그리운 노래를 흥얼거리며 축 늘어진 아이를 정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손길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슬픔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사촌 형제를 받아들이고 살아남은 아이를 볼 때면 여인의 모진 마음에도 수만가지 잡념이 들었다. 이 아이는 자라도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빼어나게 자랄수록 그 손에 스러질 목숨이 많아질 것이다. 인간이 아닌 악신의 화신으로, 연기, 피, 살점을 몰고다니며 생 또한 그렇게 마감할 것이다… 

하루고 이틀이고, 아이는 빠르게 자랐고, 점점 더 자매와 똑 닮아가는 그 얼굴이 종래에는 지옥도에 던져진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견딜 수 없을 때가 찾아왔다. 그 때마다 여인은 그 작은 아이를 갖은 방법으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매와 닮아서 구하고 싶은 얼굴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면, 미쳐가던 도중에도 제정신이 퍼뜩 돌아와 살길을 열어주고 말기 일쑤였다.

장경. 여인은 아이를 그리 불렀다. 중원인들이 샛별을 부르는 이름은 두 가지였는데, 같은 별도 동틀녘 동쪽 하늘에서 반짝일 때에는 계명성(啓明星), 해 질 무렵 서쪽 하늘에 뜰 때에는 장경성(長庚星)이라 불렀다. 하나의 별에 두 가지 이름이라니, 한 몸에 두 아이가 있는 그 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자연히 악신의 독으로 정제된 그녀의 아이에게도 이름이 생겼다.

"계명."

창을 넘어 들어온 찬 공기에 욕통의 물도 식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없으면서도 있는 이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지만 묘하게도 가슴이 시렸다.

창 밖의 ​하늘은 아직 검푸른 빛이었지만 희미하게 옅은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고향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을 싣고 거연이 돌아올 테고, 그녀의 할 일은 끝이 난다. 장경은 살아남을 것이다. 제가 그를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경은 우르골로 정제되었지만 그녀가 봐 온 실패작들과는 달리 총명하고 의젓했으며, 전설처럼 곱절의 무게도 거뜬히 들었고, 매일같이 무예를 수련했다. 이 아이는 그녀의 숙원을 이루어 줄 성공작이다. 그러니 그가 성공적인 악신의 후예로 자라나는 것을 구태여 지켜볼 이유가 더이상 없었다. 내일부로 그녀는 두 사람의 연의 끝을 고할 것이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 이제는 거의 식어 김도 나지 않는 목욕물에 몸을 모두 구겨넣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창을 보았다. 이제는 눈에 띄게 밝아진 동쪽 하늘에서 유달리 빛나는 별 하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 몸 속에 흐르는 장생천 신녀의 피가 퍼뜩 무언가를 일깨워주었다. 

​그 빼어난 아이는 최고의 무인이 되는 순간 현실과 악몽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치광이가 되어 그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끝없는 전쟁, 파괴, 약탈을 몰고 다닐 운명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 하늘 아래 최고의 무인이 둘이 될 수 있는가? 아이가 정점에 올라 스스로를 파멸로 밀어넣을 수 없게끔, 정점에 버티고 선 별이 있었다. 그 아이가 미쳐버린 채 자신을 잃고 수 많은 사람을 해치게끔 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무의 정점에 올라 우쭐대며 빛나는 몹시도 아름다운 별이.

여인은 깨달았다.

아이는 빼어난 성공작임에도 무의 정점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는 증오와 의심 이상으로 커다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살육과 파괴를 일삼는 미치광이 이리의 운명이 아닌, 칠살(七殺)과 파군(破軍), 탐랑(貪狼)을 물리칠 영웅의 운(殺破狼)으로 흐를 것이다.

숙원을 모두 쏟아낸 저주의 찬란한 끝이 그녀의 감을 스치자, 한 순간이나마 부드러워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갈 곳 잃은 미움은 한숨이 되어 나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물이 완전히 식어버린 욕통에서 걸어나온 그녀는 몸을 말리고 옷을 걸쳤다. 옷을 꺼내고 난 서랍 아래에는 종이로 감싸놓은 작은 병이 있었다. 이제는 정말 한 번 사용할 만큼만 남은 듯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해가 뜨며 바람이 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고향의 것처럼 느껴졌다. 후걸은 계명성을 바라보며 낮은 곡조로 노래를 불렀다.

 

"가장 고결한 정령, 하늘의 바람도 그녀의 치맛자락에 입을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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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회상한다면, 그것은 아주 깊고 어두운 밤이었을 것이다.

“......장경?”

늘 그렇듯 얇은 옷을 걸치고 나온 것이 오늘만은 원망스러웠다. 고윤이 옷깃을 여미며 미간을 찌 푸렸다. 물론 그는 이보다 곱절의 곱절은 혹독한 추위에서도 끄떡없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자 였다. 심지어는 얼음물에 빠지거나 눈더미에 파묻히더라도 능히 그랬다. 그러니 이것은 마음의 추위일 것이다. 그의 뼛속을 저미는 것은 바람이되 바람이 아니요, 그늘이되 그늘이 아니었으니. 마음 속 깊은 곳에 오싹한 추위가 옹송그리고 있는데 불길이 인다고 따스하랴.

“장경!”

그가 소리를 높여 젊은 의붓아들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윤이 고된 낯으로 마른세 수를 했다.

장경은 며칠 째 불안정했다. 바깥의 근심이 잦아들자 이번엔 안으로 우려가 든 것이었다. 장경은 한사코 괜찮으니 의부의 일을 하시라 하였지만 고윤은 단호하게 이 또한 자신의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는, 공적으로는 고윤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량제국의 황자 이민이었으며, 사적으로는 자신의 의붓아들이자 정인이었다. 집안의 일이기도 했고 나라의 일이기도 했으니 어찌 이를 등한 시하랴. 그렇게 딱 자르는 고윤의 앞에서 장경은 어쩔 수 없이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고윤의 등 을 그리도 떠밀었으면서 사실은 그가 가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고윤도 알았다.

그래서 며칠이나마 일을 미루고 함께 머무르고 있던 것인데, 어쩐지 잠들기 전 한참이나 뒤척인 다 싶더니. 새벽에 문득 등골이 오싹해 잠에서 깨니 장경이 없었다. 분명 곁에 있어 줄 테니 자 라고 손도 꼭 잡고 품에 한가득 안아주었건만 괘씸한 일이다. 물이라도 마시러 갔나 싶어서 기다 리려던 고윤은 어쩐지 불길한 마음이 들어 홑옷을 걸치고 침실을 나섰다.

손 안의 와사등이 불안정한 빛을 냈다. 오늘따라 후원 곳곳에 걸려있는 등불이 어찌 이리도 어렴 풋한지, 고윤은 괜스레 원망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썼다. 설마 집을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우르 골 발작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하거나 당할지 걱정이었다. 물론 장경은 발작이 이는 상태에서도 저를 통제하는 편이며, 그가 가까이하는 이는 누구도 아닌 고윤이니 그럴 일은 적었다. 하지만 도통 후부 안에서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괜히 황량하게 넓은 것이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아무리 깊은 밤중이라곤 해도 황자와 안정후가 함께 머무는 집이니 지키는 이들은 있을 텐데도 어쩐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기묘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거센 바람을 부 르는 날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바람 소리 탓에 기척의 반절이 죽는다. 고윤은 제 발 밑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도 어쩐지 반절 쯤 날아간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기묘 한 밤이었다.

한숨을 한번 내쉰 고윤이 걸음을 돌렸다. 후원을 떠돌던 발걸음을 늦춰 우선 침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 참이었다. 만일 길이 엇갈려 장경이 돌아가 있다면 저를 찾을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물 한잔 가지고 가야지. 고윤이 부엌으로 향했다.

“아? 장경!”

자박자박 걷는 고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부엌, 반쯤 열린 나무 문 너머에 익숙한 사람 형체가 서 있었다. 유등을 약하게 켜 두었는지 일렁일렁하는 형상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장경임이 분명했다. 저 풍채 좋은 등이나 머리칼을 고윤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부엌은 아까 나오 자마자 확인했었는데, 과연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고윤이 성큼성큼 부엌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 다. 괜히 마음 졸였던 만큼 걸음이 빨랐다. 나무 문에 손을 올린 그가 한 달음에 문간을 넘어 부 엌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장경이 하나 더 있었다.

문간을 넘기 직전, 시야 구석에, 부엌 옆 마루 위 그늘 속에 익숙한 형체가 스쳤다. 그림자가 삼 켰는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책자를 들고 있는 손도, 그 너른 어깨도 더없이 익숙했다. 장경 이었다. 고윤의 눈은 부엌 안의 장경을 향해 있었으나 으레 사람은 하나를 볼 때 그 주변도 함께 보는 법이다. 두 사람이 있었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에 밀려 마루 위의 장경이 시야 너 머로 스쳐갔다.

이미 들어서고 있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고윤은 부엌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우두커니 멈 춰섰다.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부엌문을 넘어버린 뒤였다. 그 자리에 못 박혀 선 고 윤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뭐였지?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마루 위에 서 있던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다. 장경이 둘일 리 없으니 아마 헛것이거나, 다른 사람을 잘못 보았겠지. 어째선지 문을 등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서둘러 떨쳐내려 한 것도 있었다. 도로 부엌문을 잡은 고윤이 바깥으로 나서려던 차.

“의부.”

그가 문을 나서기도 전에, 뒤에서 고윤을 끌어안은 장경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부볐다. 아직 잠 기운이 남은 듯 나른한 몸짓이었다. 그러면서도 귀한 의부에게 괜한 실례를 범하지 않는 차분한 기색이라 고윤은 일순 안심했다. 제가 무엇에 불안해하고 무엇에 안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아마 이 밤의 그늘이 너무도 기이한 탓이겠지.

장경은 과연 물을 마시러 나온 건지, 혹은 고윤이 깨면 마실 물을 준비하려 했던 건지 손에 물그 릇을 들고 있었다. 의부를 끌어안느라 손이 부족해진 장경이 선반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두 손으로 의부를 한껏 껴안은 장경이 물었다.

“깨셨습니까? 더 주무시지 않고요.”

 

반사적으로 저를 안은 장경의 손등을 토닥여 안심시킨 고윤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기 사람이 너무도 장경이니 바깥의 것은 아마 헛것이리라. 그래도 고윤은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장경, 밖에.......”

“밖에요? 누가 있습니까?”

부엌 바깥은 어두컴컴했다. 등불을 들고 있던 고윤이 안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은 달도 없는 밤이었다. 기괴한 바람이 웅웅 울어대느라 천지가 스산하다. 곳곳에 걸어둔 등마저 어스름한 듯 했고, 안개가 끼지도 않았는데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고윤은 자꾸만, 자꾸만 문 밖에 있는 것이 신경쓰였다. 헛것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랬다. 저 밖에 뭔가가 있어서 이쪽의 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고윤은 장경 닮은 형체가 부엌과 맞닿 은 벽에 귀를 대고 있는 형상을 무심코 떠올렸다. 그것의 눈은 새빨갛게 붉었고 사람의 것이 아 니었다. 둥그렇게 뜬 눈동자는 눈꺼풀 어디에도 닿아있지 않아 희번뜩하게 굴러다닌다. 입은 꾹 닫혀 있었지만 그 안에는 뾰족한 짐승의 독니가 있을 것만 같았다. 손톱 아래에는 사람의 살점이 끼어 있고 옷깃에는 피가 헤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고윤은 저를 탓하며 자책했다. 무슨 침상 아래에 귀신이 있다 여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정한 정인을 두고 이 어찌 헛된 생각인가. 험한 일이 있었고 날 또한 기괴하니 괜한 상상이 머리를 쳐드는 게 분명했다. 고윤이 장경을 돌아보았다.

자다 깨서 나온 탓인지 장경은 저처럼 가벼운 차림새였다. 침의도 잠들기 전에 입었던 그것이고, 외투 또한 벽에 걸려있던 그것이 확실했다. 장경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잠시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고윤이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잘못 보았겠지. 의부가 웃자 어리둥절하던 장경이 그를 따라 웃었다. 다정히 의부의 귓가에 입을 맞춘 장경이 가만히 속삭였다.

“자희, 바깥에 있는 자는 제가 아닙니다.”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웃었는데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소스라친 고윤이 퍼뜩 놀라 돌아보니 장경의 눈이 붉었다. 그러나 그렇게 새빨간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 히 외눈이었다. 우르골이 그를 삼킬 때면 두 개로 갈라져 흔들리던 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당황한 고윤이 몸을 돌려 장경의 뺨을 쥐었다. 그의 손에 고개를 기댄 의붓아들 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리도 상냥하고 온화한 음성인데도 부엌 문을 등진 고윤의 등골 에는 기묘한 소름이 돋아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문 밖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장경을 보듬어 쥔 고윤은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장경이 제 뺨을 붙든 고윤의 손 위를 제 손으로 덮었 다. 차가웠다.

“다음번에도 반드시 저를 선택해주셔야 합니다, 자희.”

“의부.”
“아셨지요.......”

고윤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이 거칠게 덜컹이고 있었다. 고윤이 눈을 깜빡이며 제 손등을 한번 매만졌다. 꿈 속에서 스 며들었던 차가운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가 곁눈질하니, 거센 바람 탓에 창이 반쯤 열려 있었 다. 아마 이 추위는 그 탓이리라.

침상에서 일어난 고윤이 창을 닫고 옷깃을 추슬렀다. 마음이 선뜩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멍 하니 침상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곁에서 잠들었던 장경이 자리에 없었다.

“아니, 또 어딜 간 게야?”

삿되었던 꿈은 금방 잊혀지고, 그가 걸려있던 외투를 걸치며 문을 나섰다. 상태가 불안정한 장경 이 발작이라도 했을까 걱정이었다. 등을 들고 홑옷을 걸치고 나오니 거센 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 고들었다. 오싹하게 살갗을 훑는 바람결에 고윤이 한번 진저리를 쳤다. 추위에 약해지는 법 없는 그라 해도 오늘같은 날씨는 꺼림칙했다. 추위 이전에 뼛속에 한기를 들이미는 듯한 기분에 등골 이 오싹오싹하다. 고윤이 빠른 발걸음으로 집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손 안의 와사등이 불안정한 빛을 냈다. 오늘따라 후원 곳곳에 걸려있는 등불이 어찌 이리도 어렴 풋한지, 고윤은 괜스레 원망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썼다. 설마 집을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우르 골 발작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하거나 당할지 걱정이었다. 물론 장경은 발작이 이는 상태에서도 저를 통제하는 편이며, 그가 가까이하는 이는 누구도 아닌 고윤이니 그럴 일은 적었다. 하지만 도통 후부 안에서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괜히 황량하게 넓은 것이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아무리 깊은 밤중이라곤 해도 황자와 안정후가 함께 머무는 집이니 지키는 이들은 있을 텐데도 어쩐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기묘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거센 바람을 부 르는 날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바람 소리 탓에 기척의 반절이 죽는다. 고윤은 제 발 밑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도 어쩐지 반절 쯤 날아간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기묘 한 밤이었다.

잠시 후원을 떠돌던 고윤이 걸음을 멈추었다. 미묘한 예감이 뒷목을 찌르는 탓이었다. 그는 직감 이 부르는 대로 부엌 쪽으로 향했다. 확실히 자다 깬 장경이 물을 마시러 갔을 수도 있었다. 아 니면 일어난 의부를 위해 물을 준비해두려고 했거나. 저도 바람소리에 일찍 눈을 떴으니 잠들기 어려운 장경이라면 오죽하랴. 그가 걸음을 서둘렀다.

“아? 장경!”

자박자박 걷는 고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부엌 옆 마루 위 그늘 속에 익숙한 사람 형체가 서 있 었다. 어두컴컴한 그늘에 삼켜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장경임이 분명했다. 저 너른 어깨나 책 자를 들고 있는 손을 고윤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연, 장경이 자리를 비운다면 서재나 부엌이 가장 확률이 높았다. 괜히 후원을 떠돌았던 제가 멍청하게 느껴져 고윤이 걸음을 빨리했 다. 요새 세태가 어려운 만큼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했던지, 아니면 갑자기 대량제국을 위한 어떤 묘책이 생각났을 수도 있으리라.

별 생각 없이, 고윤이 장경을 부르며 마루로 다가섰다. 고윤을 발견한 장경도 희미하게 웃으며 내려와 신을 신고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쨍그랑!

손이 닿는 순간, 부엌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날카로운 소리가 제 가슴을 칼로 휙 베어낸 듯 해 고윤이 일순 선뜩한 낯을 했다. 소리에 맞아 깨어난 것처럼 그가 퍼뜩 정 신을 차렸다.

아, 다음번에도 그 애를 선택하기로 했는데.

의식하기도 전에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나서야 고윤은 어라, 하며 입을 닫았다. 잠깐, 꿈과 이 상황이 너무 비슷하지 않나? 그가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저 기시감일 뿐인가? 어 떤 것을 언젠가 꿈에서 본 상황이라고 착각하는 기괴함일 뿐일까? 고윤이 장경과 부엌을 번갈아 보았다. 장경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엌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을 향한 눈은 붉지 않았고 동 공도 하나였다. 차분한 신색은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안정된 몰골이라 고윤은 무심코 안심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가 망설임 끝에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있나? 마침 목이 마르구나, 장경.

” “글쎄요, 왕숙? 제가 보겠습니다.”

장경이 먼저 걸어가 부엌 문을 열었다. 반쯤 열려 있던 안쪽은 등을 켜놓지 않아 새까맣기만 했 다. 그늘로 가득한 안쪽에 고윤이 들고 있던 와사등을 비추니, 문간에서부터 기묘한 그늘이 늘어 진다. 작은 그림자조차 길쭉하게 흔들리자 부엌 안쪽의 기괴한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 고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꿈속에서처럼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가 어둠이나 귀신 따위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일까? 무언가가 그의 머리칼 속에 손을 밀어넣고 그를 살살 근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부엌 안을 한번 둘러본 장경이 바닥에 떨어진 물그릇을 들어올렸다. 그릇 안에는 물기가 없었다. 장경이 그릇이 놓여있었을 법한 선반을 살펴보더니 고윤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지 않았다.

“이게 떨어졌나봅니다. 쥐라도 있는 걸까요?”

“음, 바람일 수도 있겠지.”

무언가 줄곧 석연치 않았지만, 뭐, 장경은 여기 있었다. 그저 꿈이거나, 꿈에서 이와 같은 일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흔한 기시감이리라. 고윤과 장경이 사이좋게 물을 나눠마시고 부엌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려면 먼 시간이었다.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장경을 재우고 자신도 한숨 더 자야 될 것 같았다. 밤에는 달이 없어 기괴했다지만 태양이 사라지는 때는 없다. 햇살이 내리쬐면 이 모 든 삿된 것들은 그늘 속으로 사그라들 것이다. 그러면 밤중엔 뭘 그렇게 꺼려했는지 스스로를 타 박하며 어이없어 웃겠지. 고윤이 부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 안에서,

 

......자희.”


하고.

문을 닫은 고윤이 잠시 우두커니 멈춰섰다. 맞닿아 닫힌 나무문 사이로 붉은 것이 언뜻 일렁이는 듯 했다. 안에 무언가 있었다. 다음번에도 저를 선택해달라 속삭였던 그것이 고윤을 바라보고 있 었다. 고윤이 부엌 문을 붙들고 섰다. 한기어린 바람이 그의 얇은 옷자락을 스쳤다. 그는 침묵했 다. 등 뒤에서, 문 너머에서, 네 개의 눈동자가 고윤을 바라보았다. 우르골과 장경의 눈이었다. 헌데, 어느 쪽이 우르골이고 어느 쪽이 장경일까? 고윤이 장경을 처음 안 그 순간부터 장경 안에 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경을 구분해낼 수 있을까? 누가 ‘장경’일까?

고윤의 뒤에서 한 걸음 걸어온 장경이, 의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쥐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 다. 낮고 고요한 음성이었다. 방금까지 웃었는데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부엌 문을 짚은 고윤 의 손끝에 기묘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자희, 안에 있는 자는 제가 아닙니다.”

우르골은 새빨간 것, 새까만 것. 한 사람 안의 두 사람, 악몽을 부르는 것, 밤 그늘 속에서 일렁 이는 것, 침상 아래의 괴물. 어느 쪽이 진실일까? 누가 껍데기를 쓴 것일까?

안인가, 밖인가?

누가 장경이지?

다음 날, 장경의 상태는 썩 호전되었다. 며칠 불안정했던 것도 한동안 고되었던 탓이리라. 진경서 는 안신산과 함께 몇 가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약재를 처방하면서, 최대한 무리하지 말고 매일 조 금이라도 잠을 자라고 당부했다. 늘 품고 다니는 주머니에 안신산을 보충하던 장경이 가볍게 웃 었다. 턱을 괴고 잘 자란 미인을 구경하던 고윤이 왜 웃느냐고 물었다.

“꿈에서 자희가 저를 선택해주셨습니다.”

고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장경의 꿈이었을까, 고윤의 꿈이었을까? 혹은 현실로 기어나온 우 르골의 피묻은 손끝이었을까?

와사등이 아릿아릿 새벽 그늘을 몰아내는 밤, 나무 문과 등 뒤의 그늘 사이에 서서, 그는 어느 쪽을 선택했던가?

장경의 눈은 여전히 온화한 빛이었다. 그의 뺨은 따스했고 아침 햇살은 후부의 그늘을 모조리 몰 아내었다. 고윤이 빙그레 웃으며 아침부터 어여쁜 정인의 뺨을 쥐고 이잇, 한 차례 흔들었다. 아 픕니다, 자희, 엄살을 부리는 장경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킥킥대며 그의 눈가에, 뺨에, 입술에 쪽쪽댄 고윤이 엇차, 침상에서 일어섰다. 밤을 몰아낸 햇살이 후부를 노릇노릇 데우고 있으니, 잘 난 미인과 아침산책을 한번 한다면 밥맛이 참으로 좋을 것이었다. 고윤이 장경의 손을 잡았다. 익숙한 안신산의 편안한 향내가 풍겨나왔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 고 말하는 듯한 온화한 향이었다. 그러나 침실을 나서기 전, 고윤은 침상 아래의 그늘을 한 차례 흘긋 바라보았다. 사락,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그는 자신이 두고 온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안이었을까, 밖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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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7

우르골 장경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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